Lee, Man-soo

이만수_004

이만수       이만수  Lee, Man-Soo

 

수상

1989  제8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한국화 대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학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학사

홍익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석사

 

연구 및 교육경력

現 성신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개인전

2017 갤러리 그림손 (서울)

2016  P339 Gallery (N.Y)

2015  갤러리 울 (고양)

2014  LA Artcore union center (U.S.A)

2013  홍보재 (중국, 하문)

2013  그림손갤러리 (서울)

2011  장은선갤러리 (서울)

2009  담 갤러리 (서울)

2007  모란 갤러리 (서울)

2005  UTAH state University NORA ECCLES HARRISON Museum

2005  Julie Nester Gallery (U.S.A)

2002  공평아트센타 (서울)

1998  덕원갤러리 (서울)

1996  공평아트센타 (서울)

1995  갤러리동문당 (서울)

1994  한성화랑 (부산)

1991  공평아트센타 (서울)

1991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서울)

1990  금호미술관 (서울)

1990  관훈 미술관 (서울)

 

주요그룹 및 초대전

2016 International art exchange show Korea- U.S.A. (강동아트센터)

2015  지금 여기 (포항시립미술관)

2015  광복70주년 특별전 (세종미술관)

2014  마주보는 그림이야기 (강릉시립미술관)

2013  탄생 (양평군립미술관)

2012  International Exchange Exhibition (Artcore Gallery, LA)

2011  MANIF2011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10  힘있는 강원전 (춘천시립박물관)

2009  Things Within, Things Beyond (Kwai Fung Hin Gallery)

2008  우리안의 신화 (토탈미술관)

2007  경남국제예술제 (경남도립미술관)

2005  서울 미술 대전 (서울시립미술관)

2004  그리스 화필 기행전 (사비나미술관)

2002  한국 미술의 자화상전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000  고전의 지혜 현대인의 삶 (공평아트센타)

1999  한국화의 위상과 전망전 (대전시립미술관)

1997  한국화의 오늘과 내일 ’97 (워커힐미술관)

1996  대상수상작가전 (국립현대미술관)

1995  한.중미술교류전 (북경, 민족문화궁)

1991  현대한국화전 (호암갤러리)

1990  젊은 모색 90전 (국립현대미술관)

1989  43인 초대전 (조선일보미술관)

 

심사 위원

제30회 대한민국미술대전 비구상부문 3차 심사위원

 

현재

한국미술협회

가두리 속 삶의 정경 위로 꽃비가 내리다 / 고충환 (미술평론)

작가는 낚시를 즐긴다고 했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취미라고도 했다. 어떤 사람에게 낚시는 구실이며 아이러니다. 무슨 말이냐면, 낚시는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낚고 세월을 낚고 기억을 낚고 회한을 낚고 유년을 낚는다. 마치 인터넷의 바다를 서핑하고 캡처하듯 흐르는 물속에서 단상들을 낚아 올린다는 점에선 같지만, 정신을 집중하는 것과 느슨하게 유지하는 등 집중력의 밀도감이 다르다. 집중은 일상의 일이지 낚시의 일은 아니다.

낚시의 덕목은 오히려 방임과 방심 쪽에 가깝다. 자기를 놓아버리는 것. 그렇게 방심하고 있어야 더 잘 보이고 더 잘 낚이는 것들이 있다. 할 일 없이 거닐 때 눈에 더 잘 들어오고 더 잘 붙잡히는 일들이 있는 법이다. 삶의 목적성을 내려놓는 방심이나 의식의 끈을 느슨하게 잡아 오히려 무의식을 투명하게 하는 소요가 예술과도 통하고 하다못해 공상과도 통한다. 그렇게 방심과 소요를 프리즘 삼아 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바로 흐르지 않는 물을 통해 흐르는 물이 보인다. 표면을 통해 이면이 보이고 정적인 것을 통해 동적인 것이 보인다. 바로 정중동이 아닌가.

그렇게 작가의 화면은 정중동의 와중에서 건져 올린 시간이며 세월이며 기억이며 회한이며 유년의 단상들로 점경을 이루고 있다. 점경이라고 했다. 뭔가 아스라해서 잘 보이지도 잘 붙잡히지도 않는 풍경이다. 아득하고 아련한 풍경이라고나 할까.

이처럼 그 풍경이 아득하고 아련한 것은 흐르는 의식(아님 무의식?) 속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며, 시간과 망각의 풍화로부터 건져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경들 위엔 무슨 투명한 피막처럼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아 있고, 망각이 공기처럼 감싸고 있다. 그 투명한 더께와 공기 뒤편으로 무엇이 보이는가. 흐르지 않는 물을 통해 보이는 흐르는 물속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여차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이며, 존재감이 희박해서 오히려 더 또렷하고 오롯한 것들이 보인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흐르는 물속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다.

작가는 그림을 마당에다가 비유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마당은 평면이다. 이렇게 해서 작가의 그림이 평면으로 와 닿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너무 단순한가. 그래서 허망한가. 주지하다시피 평면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핵심이며 중추가 아닌가. 회화가 가능해지는 시점이며 최소한의 조건이 평면이다. 이처럼 평면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회화의 본질과 이유를 묻는 개념미술의 일면이 있고, 회화의 가능조건으로 회화를 소급시키는 환원주의적 태도가 있다.

작가는 말하자면 마당이라는 결정적인 베이스를 가정함으로써, 그리고 마당과 평면을 일치시킴으로써 의식적으로나 최소한 무의식적으로 회화 자체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마당은 누워있는 그림이고 평면은 서 있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누워있는 그림으로 하여금 어떻게 서 있는 그림에 일치시킬 것인가. 서 있는 그림을 어떻게 마당처럼 쓸 것이며 마루처럼 닦아낼 것인가. 여하튼 순백의 화면을 그렇게 쓸고 닦아야 비로소 그림이 되지가 않겠는가. 무정의 화면을 유정의 화면으로 바꿔놓을 수 있지가 않겠는가.

여기서 마당은 다른 말로 하자면 장이다. 장은 알다시피 회화의 됨됨이와 관련해 미학적으로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개념이다. 회화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장과 마당과 평면이 하나로 통하는 것.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장이며 마당이며 평면 위에 무엇을 어떻게 올려놓고 있는가.

작가의 그림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히는 모티브들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평면적이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이를테면 핸드폰을 거는 사람,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람, 종종걸음을 걷는 사람, 새와 오리와 강아지 그리고 가옥과 같은 일상의 정경들이 전개되고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같이 어떤 감각적 실재로서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가 않다. 적어도 외관상 깊이가 없는 평면 위에 일상으로부터 채집된 단상들이며 모티브들이 마치 콜라주 하듯 얹혀 있다(작가는 실제로 콜라주를 주요한 방법으로 차용하기도 한다).

원근법에 의한 환영적인 깊이나 화면 속에 공간적인 깊이를 조성하는 내진감이 만들어낸 화면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감각적 현실을 재현한 공간으로서보다는 작가의 관념에 의해 재구성된 관념적 공간에 가깝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에서 관심의 축이며 방법론의 축은 감각적 현실의 재현에 있기보다는 일종의 관념적 공간을 재구성해내는 일에 그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 그렇다면 이렇게 재구성된 작가의 관념을 읽어내는 일이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자신의 관념으로 세계를, 자연을, 일상을 어떻게 재구성해내고 있는가. 관념의 프리즘을 통해 본, 그래서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우주의 꼴은 어떤가.

작가는 그림을 마당(사실상 작가의 우주에 해당하는)에다가 비유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림을 마당처럼 비로 쓴다. 비유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쓴다. 가늘고 딱딱한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일종의 작은 비나 풀을 먹여 빳빳하게 세운 붓 내지 끝이 무딘 몽땅 붓을 붓 대신 사용하는데, 여러 겹 덧바른 안료 층 위에 이 비로 쓸어내리면 소지 자체의 신축성 탓에 화면에 비정형의 홈이며 자국이 생긴다(홈은 소지의 특성에 따라서 캔버스보다는 종이에서 더 또렷한 편이다).

그리고 그 위에 또 다른 안료 층을 덮고 마치 걸레로 마루를 닦아내듯 화면을 물로 씻어내는데, 그 수위를 조절하는 여하에 따라서 그림이 흐릿해지기도 또렷해지기도 한다. 여하한 경우에도 색 자체가 드러나 보이는 법은 없는데, 마치 시간의 지층으로부터 끄집어낸 듯, 기억의 한 자락을 건져 올린 듯, 과거로부터 불현듯 현재 위로 호출된 듯 아득하고 아련한 분위기가, 작가 고유의 아이덴티티랄 만한 특유의 아우라가 조성되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유년에 기인할 절간의 벽화처럼 시간의 흔적이며 풍화의 흔적 그대로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색감이며 색채 감수성이 확인되는 부분이다.

이로써 어쩌면 작가의 관심은 그 흔적에 있을지도 모르고, 아예 어떤 흔적(이를테면 삶의 흔적 같은)을 만들고 조성하는 일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삶 자체보다는 삶의 흔적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인데, 비로 쓸어내린 스크래치(그 자체 삶의 상처며 트라우마의 표상으로 볼 법한)도, 굳이 씻어내고 닦아내면서까지 얻고 싶은 색 바랜 색감도 바로 그 흔적을 부각하는 일에 종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 자체가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작가는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고 만든다.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낸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만든다? 이야 말로 자기수양이고 수신이 아닌가. 전통적인 그림에서 요구되던 태도며 덕목이 아닌가? 윤동주의 <참회록>에는 밤이면 밤마다(왜 하필이면 밤인가? 시인에게 밤은 무슨 의미인가? 암울한 시대며 현실에 대한 표상? 무기력한 존재의 표상?)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는 시인이 나온다. 뭘 참회할 일이 그렇게나 많았을까.

더욱이 시인이. 시인의 참회이기에 그 참회가 예사롭지가 않다. 시인의 참회? 자기반성적인 인간의 참회? 거울은 자기를 반영하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거울을 닦는 행위는 사실은 자기를 닦는 행위이다. 작가는 이렇게 비로 쓸어내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그림을 그리고 만들면서 사실은 자기를 쓸어내고 닦아내고 씻어내고 있었다(방심과 소요를 위한 방편으로서 의미기능하고 있는 낚시 역시 일정하게는 이런 수신과 통한다). 그렇게 자신의 관념과 그림의 방법론을 일치시키고 있었다. 흔히 관념과 방법이 겉도는 경우와 비교되는 것이어서 더 신뢰감이 가고 설득력을 얻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그림은 감각적 현실을 재현한 것이기보다는 관념적 현실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했다. 마당이며 장이며 평면적 조건으로서 배경을 대신한 것이나, 쓸고 닦고 씻어내는 방법론에다가 자기수양이며 수신의 관념적 의미 내지 실천논리를 일치시킨 것이 그렇다. 이처럼 관념적인 그림은 상대적으로 상징이며 표상형식이 강한 편이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상징으로는 대개는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한 큰 물방울과 원형을 들 수가 있겠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물방울은 사람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상징한다고 했다. 삶의 희로애락을 압축해놓은 상징이다. 그리고 그 상징적 의미는 작가의 그림을 시종 뒷받침해온 산조의 주제의식과도 통한다.

산조 곧 노랫가락이란 것이 원래 삶의 희로애락을 녹여낸 것이 아닌가. 그리고 원형은 완전하고 온전한 삶의 지향을 상징하고, 반복 순환하는 존재의 원리(비의?)를 상징한다. 알다시피 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밑도 없고 위도 없다.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운동이 있지만 방향도 없다. 다만 끊임없이 연이어지면서 되돌려지는 과정이 있을 뿐. 아마도 그렇게 연이어지면서 되돌려지는 원주는 이렇듯 반복 순환되는 존재와 더불어 윤회하는 존재도 의미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 억만 겁의 원주 위에 잠시 잠깐 등록되어졌다가 삭제되는 찰나적인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처럼 의미심장한 의미들을 각각 물방울과 원형이라는 상징과 표상형식에 담아냈다. 여기서 상징과 표상이 강하면 자칫 그림이 도상학적으로 빠질 수도 있는데, 그러나 작가의 그림은 도상학에 빠지지가 않는다. 알다시피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상징과 표상의 꼴이 그림의 살의 일부가 될 지경으로 스며들게 한 것이다. 상징과 표상의 의미를 무리 없이 전달하면서도 도상학에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감각의 문제이며 작가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관념적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된 현실을 한정하는데, 바로 그림의 가장자리를 일종의 띠 그림으로 둘러친 것이다. 삶이 전개되는 장으로서의 마당이 갖는 의미를 삶의 가두리라는 또 다른 의미로 강조한 것이다. 삶의 의미를 지시하기 위해 각각 마당과 가두리가 호출되고 있는 것인데(보다 일반적으론 무대의 개념을 떠올려볼 수가 있겠다), 현실을 재구성하기 위한 일종의 관념적인 장치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된 현실 위로 꽃비가 내린다. 매화 꽃잎이다. 어떤 매화 꽃잎은 무슨 밭고랑인양 가로 혹은 세로로 줄을 짓고 있어서 저마다 살아온 삶의 고랑(작가의 용어로 치자면 주름)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매화 꽃잎은 별자리로 둔갑해 사람들의 꿈을 대리하고, 이도저도 아닌 꽃잎들은 그저 삶의 정경 위로 축복처럼, 위로처럼 흩날린다. 그리고 그렇게 흩날리면서 쓸쓸한 삶을 감싸 안는다.

 

마당 깊은 화면 / 박영택 (경기대학교, 미술평론)

이만수의 근작은 ‘산조’(散調)란 제목을 달고 있다. 흩어진 소리, 허튼 소리라!

그래서인지 그림들마다 잔잔하고 시정이 넘치면서 은은한 운율과 청각을 자극하는 소리들로 무성하다는 느낌이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음악이 있다. 우리네 가락과 운율이 짙게 베어 나오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가 보다. 정악에 반한 자유로운, 파격에 가까운 음으로 모든 자연의 소리와 인간세의 소리가 다 들어와 무르녹은 그런 음의 시각화, 아울러 이미지와 소리가 하나로 고인 그림을 길어 올리고자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소리/이미지는 무엇보다도 유년의 기억과 고향에 대한 추억으로 몰려 이를 시각과 청각 모두를 가볍게 흔들어대면서 흩어진다. 그림이 무척 허정하고 스산하다.

죽죽 그어놓은 듯한 붓질/선묘 자국이 빗질처럼 나있는 화면에 매화꽃이 눈송이처럼 떨어진다. 삭히고 걸러낸 토분색이 그대로 마당을 이룬 화면에 사람과 새, 집과 꽃, 차와 개 등이 둥둥 떠 있다. 무채색으로 가라앉아 멀건 화면에 홀로 서있는 이는 만사 고독해 보인다.

눈발마냥 꽃송이 흩날리는 적막한 봄날, 잔잔한 바람에 마냥 흔들리는 대나무 숲, 누군가의 등에 비치는 오후의 햇살, 마당에 내려와 무언가를 쪼아대는 새들,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개가 있고 그런가하면 가물가물한 추억 위로 떠다니는 흐릿해진 어떤 이의 가물거리는 얼굴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더러 죽죽 그어놓은 자국이 폭포가 되고 계곡이 되는가 하면 이내 대관령 고개 넘어가다 보이는 주변 산의 울울한 나무가 된다. 하단에 흐리게 그려진 인물을 보니 옛사람이 그린 관폭도나 관수도 또한 아른거린다. 화면은 순간 경계없이. 대책없이 무한해서 마냥 황홀하다. 무척이나 ‘센티멘탈’하다.

그리고 감각적으로 세련되게 조율되어있다. 나로서는 이 장면의 설정이 다분히 그의 고향 강릉에 관한 추억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대나무와 매화꽃이 가득하고 바닷가와 호수가 자리한 곳, 집과 마당이란 장소성에 대한 기억을 몇 가지 상징들과 함께 아련한 색채로 펼쳐 보이고 있다. 아련하고 박락되어 문드러진 색감은 지난 시간의 아득함과 아련한 추억, 몇 겹으로 주름을 만들고 가라앉는 시간의 퇴적을 암시한다.

한지 위에 아교를 바르고 토분과 호분을 반복하여 칠해 만든 독특한 화면은 부드럽고 연한 색채로 덮여 있다. 그것은 칠해지거나 스며들어 있기 보다는 종이와 완전히 밀착되어 견고하고 투명한 지지대가 되었다. 일정한 두께로 마감되어 있어서 그 피부 위를 긁고 메꿔서 생긴 자국이 붓질을 대신해서 독특한 선묘의 맛을 자아낸다. 지극히 평면적이면서도 긁어서 생긴 상처들과 그려진 이미지, 그리고 콜라주로 부착된 도상들로 인해 화면은 섬세한 요철효과로 인해 공간감을 자극한다. 해서 화면은 매우 얇은 저부조를 만들어 보인다.

그려진 부분과 인쇄된 종이를 오려 붙여 만든 콜라주, 여백 같은 바탕 화면에 수직과 수평으로 지나가는 붓질/선, 작게 위치한 일련의 도상들이 만나 형성한 화면은 독특한 시감을 만드는 데 주어진 평면위에 자리한 것들은 평등하게 존재한다. 여기에는 일종의 범신론적이고 물활론적 사유가 고여있다. 빛과 공간을 배제한 이 평면적인 화면은 색채와 반복적인 화면 구조 속에서 작은 형상들은 중심과 주변도 없이 순환되고 서로를 바라보거나 서성인다. 이들은 개별적인 개체로서 자리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인연의 그물로서 연루되어 그 보이지 않는 관계 속에서 읽혀진다.

나뭇가지가 붓이나 칼, 연장이 되어 수직으로 흩어나간 자취는 마치 마당에 빗질을 해서 생긴 흔적 같다. 땅위에 새긴 무수한 인연과 시간의 자취, 지난 시간의 궤적과 뭇 생명체들이 대지/마당과 함께 했던 삶의 얼룩과 잔상들이 아롱진다. 그의 화면은 그대로 우리네 전통적인 마당이다. 그는 화면을 유년의 집 마당으로 설정했다.

바탕은 마당처럼 처리되고 붓질은 빗질처럼 구사되는 한편 마당에 서린 모든 흔적들을 촘촘히 그려 넣고 오려 붙였다. 그는 추억 속의 마당을 화면 위로 불러들여 재구성했다. 조감의 시선 아래 펼쳐진 세계는 자연과 사물, 인간이 바글거리는 기이한 풍경을 선사한다. 마치 산수화에서 접하는 시방식이 납작하게 평면화 시킨 공간 위로 스물 거리며 지나간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내밀한 추억과 인성에서 차분하고 격조 있게 스며 나오는 이런 그림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국인에게 마당이란 장소성은 한국 문화 특유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소다. 비교적 넓은 마당을 두고 사람과 가축, 짐승과 꽃과 새들이 한 식구로 살았으며 그 위로 사계절의 시간이 내려앉았고 눈과 비가 왔으며 꽃잎이 떨어지거나 새가 날아와 앉았다 갔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발자취와 그분들이 뒷모습이 어른거리고 누군가 태어났고 누군가 죽어서 그 마당을 마지막으로 생의 인연을 끊어내고 산으로 갔을 것이다. 어느덧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작가는 문득 고향과 마당 있던 자신의 집을 떠올려본 것 같다. 근작은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사연과 서사를 적극적으로 담아낸 그림이다.

이전부터 지속되어왔던 자연과 인간의 병치와 이중화면, 파스텔 톤으로 조율된 색채 등 표현방식은 여전하지만 근작은 그것들을 좀 더 안으로 밀어 넣고 있다. 맛깔스러우면서도 장식성이 강한, 동시에 전통적인 미감과 사유를 하나로 묶어내려는 시도가 눈에 밟히는 그림이다.

그림은 작가의 유년시절 고향과 관련된 이미지들이자 그 곳을 다니는 길에서 본 풍경들을 소환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추억의 풍경이자 현재의 시간에서 수시로 출몰하는 진행형의 잔상들이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비늘처럼 퍼득이고 칼날처럼 반짝이는 것들을 현재의 시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림을 그리는 현재의 시간, 흐르는 그 시간의 등위에 과거의 기억들이 잠시 멈춰서서 부르르 떨다가 이내 응고되어 꽃잎처럼 진다. 지난 시간은 내밀하고 침침하게 내성적으로 자신을 이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구체적인 경험과 기억들, 무수한 시간의 주름과 결들을 납작한 평면위로 호명한다. 그림은 그 주름을 기억하고 각인하는 무슨 의식과도 같다. 그는 몇 겹으로 눌려있고 주름져있던 그 시절의 아련하고 비릿하고 가슴 아프게 시리고 저린 기억/사연들을 색채와 기호/도상들로, 빗질/붓질로 써나간다.

여기서 주름은 한 사물의 피부에 눌려있는 시간과 살아온 생의 기억들을 보여주는 상처다. 기억은 주름져있다. “주름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과의 관계 혹은 의식의 통로이며 행위의 연속된 궤적이므로 시간 속에서 투명한 선으로 수렴된다.”(작가노트)

그래서인지 그림은 미세한 주름, 두드러진 굴곡같은 주름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붓/빗으로 주름을 그린다. 이 세상은 온통 주름투성이다. 따라서 주름은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과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에 대한 ‘존재증명’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때 형태적 혹은 물리적으로 주름은 선이 되며 이는 형태의 최전선을 이룬다. 작가는 주름 속에 분포되어 지속되는 삶의 모습과 기억 혹은 리듬을 ‘산조’라 부른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그림은 ‘산조‘(散調)란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상형문자로 기록된 그림은

“적막한 봄날, 바람에 흩날리는 꽃송이와 흔들리는 숲-소리, 마당과 들녘, 산과 바다-그리고 이 모든 것들 사이에 개입하는 시간과 공간의 궤적 속에 부유하는 희미한 얼굴들과 사물들에 대한 표현이다.”(작가노트)

그는 납작한 평면의 종이/캔버스의 피부위에 동양화물감과 백토를 칠하고 빗자루질을 한다. 그것은 모필의 필력과 동일시된다. 골을 메꾸고 칠해나간 색들을 다시 벗겨내는 일이다. 비워내고 지우고 탈색을 거듭해서 만든 그야말로 허정하고 깊은, 모든 것들이 다 스친 후에마지막으로 남겨진 느낌을 만든다. 여러 번의 빗질/붓질은 사람 사는 일의 갈등과 고뇌, 무수한 사연의 겹침들이자 그것들을 씻고 닦아내는 일종의 해원과도 같다.

그는 새벽 혹은 해거름 그 사이의 지점에서 마당을 떠올렸다. 그에게 어린 시절 집 마당이란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이며, 생겨나고 사라지는 삶이 욕망뿐 아니라 자연의 모든 것들이 관찰되고 사유되어지는 거울과 같은 장소”다. 그 마당을 쓴다는 느낌으로 화면에 붓질/빗질을 하면서 쓰는 것은 “무엇인가를 씻어내는 일이자 그곳에 묻혀있는 인연들을 반추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삶의 욕망과 집착의 반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마음의 행위“란다.

해서 채색과 탈색을 반복한다. 쓰고 지우고 칠하고 벗겨내기를 지속한다. 마치 산조의 리듬처럼 말이다. 긋고 칠하고 칠한 만큼 닦아내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작가는 “삶의 주름들을 긍정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고 리듬감 있는 선조와 투명한 색조의 희열”에 이르고자 한다. 그것은 “절정의 순간에 대한 서술이며 텅 비어있는 순간에 대한 체험”에 다름 아니기에 그렇다.

 

투명함 · 산조(散調) / 서정걸 (미술사 미술평론)

마당에 대한 추억

이만수의 최근작들이 내 기억의 한 자락을 들추어냈다.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공간이 되었지만, 그곳은 유년기의 기억을 채우고 있는 정겨운 놀이터였으며 우리 삶의 가장 안온한 공간이기도 했다. 그 안전지대에서 우리는 놀며 자랐다. 집집마다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으로서 한 조각씩 차지하고 있었던 마당. 그곳은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라 고추나 벼같은 작물을 널어놓기도 하고 병아리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는 변화하는 화폭이었다.

우리는 그곳에 막대기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기도하고 금을 그어놓고 놀이를 했다 그곳은 사철 갖가지 풍경을 제공하는 광장이자 놀이터였으며, 때론 일터였다. 생각해보면, 마당은 단순한 흙바닥이 아니라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곳이었다. 모깃불을 지핀 마당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리는 자랐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쓸어본 기억이 있다. 싸리비가 지나가며 만들어 놓는 자국들은 추상적인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몸가는 대로 휘저어 생성된 무작위의 선이었다. 토담 벽면의 그것이나 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의 문양, 분청사기의 귀얄문양이 또한 무작위의 선들이다. 창작의지나 계획된 행위가 아닌 순수한 형상들이자, 한국미술의 시원과 같은 것이다.

한국미술에 있어서 무작위는 ‘손가는 대로’라기 보다는 삶의 순수한 몸짓이자 자연의 몸짓이다. 칠하거나 그리거나 만드는 행위에서 인위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기에 구애됨이 없이 대범하다. 절제되어 있고, 겸손한 미덕이 있다. 서툰 듯 하지만 거칠거나 옹졸하지 않고, 어설픈 듯 하 지만 어긋나지 않는다.

이만수의 작업에서 한국미술이 함유하고 있는 미덕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지향하고 있는 조형적 태도가 어떠한 지를 말해준다. 작업 방법에 있어서 그는 칠공예 기법이나 상감기법 같은 우리 고유의 기법들을 응용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많은 작가들에게서 한국적 감성은 발견된다. 그러한 미적 감성에 동양 회화를 학습하면서 얻은 지식과 자신이 개발한 기법, 현대적인 조형어법과 개인적인 취향 등이 가미되어 이만수 회화의 독창적인 모습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강한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을 만난다. 그것은 때로 화면의 이미지가 지시하는 것과 관계 없이 개인적인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그 내용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거기에는 공통된 정서가 작용한다. 그의 작품에서 마당을 연상한 것은 개인적인 체험에서 연유했지만, 그 감성의 연원은 작가와 공유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만수 작품의 경우는 아마도 흙이 주는 부드럽고 따스한 정서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이다. 어떤 안료에서도 느낄 수 없는 친근한 느낌의 질감. 서양음악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정서를 우리의 가락에서 발견 할 수 있듯, 그의 작품은 손톱만큼의 기름기도 가미되지 않은 천연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산조(散調) · 투명함

흙이 지닌 따스함과 정제되고 절제된 색채가 좋았다. 맑고 투명한 느낌이다. 90년대 후반의 그의 작품들은 거칠고 어두웠다. 시대적 분위기가 그러했고, 미술의 경향이 그랬다. 질풍노도와 같은 30대의 젊은 혈기가 온화함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그의 작품들은 놀랄 만큼 변해있다.

그 바탕 이 온화하고 따뜻하며 안정되어 있다 표현방법이나 이미지의 활용 등에서 유사한 점들이 있으나, 작품이 지닌 품성이 변해있다. 조형적 목표가 뚜렷해진 느낌이다. 어둡고 탁한 분위기는 허물을 벗듯 사라지고 깊고 풍부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아마도 연륜일 것이다. 적절히 절제되어 있고, 겸손함이 있는 화면이다. 이만수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맑음’과 ‘투명함’이다. 그 바탕 위에 산조의 가락을 연상시키듯 리듬감 있는 선들이 흩어져 있다.

맑고 투명함, 천연의 정제되고 부드러운 질감이 어떻게 생성되었나? 무엇보다도 흙이라는 재료의 독특한 사용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반복된 칠작업, 다시 닦아내는 그의 작업과정으로부터 정제되고 차분하고 깊이 있는 화면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는 흙이 주는 훌륭한 예술적 느낌을 작품의 과정으로 수용했다. 그의 작업은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한지 위에 아교를 바르고 그 위에 토분과 호분을 반복하여 칠한다. 칠하는 과정은 아마도 옛 칠공예가들의 장인적 숙련과 정성, 바탕을 만드는 경건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도공이 흙의 불순물을 걸러내고 찰 지게 만드는 수비과정과 유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토분을 두텁게 올린 후, 그 위에 그가 원하는(또는 무작위의 행위로서) 이미지를 그린다. 그린다기 보다는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들은 대나무나 매화 같은 이미지들을 보여주지만, 그는 마당에 비질을 하듯 무작위로 그려낸다. 매화나 대나무를 주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닌 리듬감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진정한 무작위, 그리고 조화로운 리듬감을 화면에 부여한다. 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어설픈 무작위는 지저분하거나 부조화스럽다.

90년대 후반의 작품들에 가해진 선들이 다소 무질서했다면 이번 작품들은 그런대로 상당한 경지를 보여준다. 속도감 있는 선들은 형상을 이룰 듯 말 듯, 흔적인 듯, 이미지인 듯, 또는 문양인 듯, 그렇게 화면에서 리듬감을 발산한다. 그 흔적들은 선승들의 무아지경도 아니고, 그저 마당을 쓸 듯, 겸손하고 솔직한 감성을 겨냥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움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칠하기와 닦아내기

그는 흔적 위에 원하는 색채를 도포한다. 그리고 다시 닦아낸다. 그러면 도포된 색채는 흔적 부분에 메워진 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지워진다. 이러한 방법은 상감기법과 칠기기법 등 공예기법을 회화적으로 응용한 것이다. 때때로 꽃문양이나 인체형상을 오려 붙이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나전칠기 같은 공예적인 작업 기법을 응용한 것이다.

특히 닦아내는 과정은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닦아내는 정도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는 물이 이용된다. 물의 양을 조절함에 따라 탁해질 수도 있고 맑아질 수도 있다. 그는 원하는 만큼 색채를 칠하고, 다시 원하는 만큼 색채를 덜어낸다. 물의 작용에 의해 화면은 맑게 걸러진다.

우리가 감상하는 것은 늘 결과물이지만,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작가는 또 다른 예술적 경험을 한다. 작업과정에서 느끼는 작가의 경험을 관찰자가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은 별개이면서 동일할 수도 있다. 과정이 작품에 그대로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화면에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고안한 과정에 의해서만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고, 그 화면에서 관찰자는 작업과정에 있는 작가의 느낌을 간접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경험의 실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생성될 수 있는 분위기를 공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맑고 투명하고 두터운, 그리고 따뜻하고 그윽한 느낌이다.

이만수의 작품을 보면 그가 동양예술의 미학과 예술철학이 가리키는 좌표 위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화가로서 동양적 또는 한국적 심미관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현실적 가치, 현대인의 미감으로 현재화해내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개성이 되는 것이다. 음미할수록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이만수 회화의 특징이다. 이번 전시작품들은 그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노력한 끝에 얻어낸 것이겠지만, 완숙한 작품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의 단계라고도 생각된다. 언제나 새로운 발견이 성취를 가져다준다. 새벽의 마당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때의 느낌처럼 명징한 정신이 담긴 훌륭한 작품들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인간과 자연의 울림과 운율 / 이주헌 (미술평론가)

20세기 이전의 서양미술 전통을 일컬어 흔히 ‘환영 창조의 전통’이라고 한다. 허구의, 그러나 사실같은 이미지를 창조해온 전통 이라는 의미다. 그만큼 서양에서는 사물과 공간을 사실처럼 재현해내는 데 오랫동안 큰 관심을 쏟아왔다.

원근법, 스푸마토 기법, 키아로스쿠로 기법 등 다양한 재현 기법이 그렇게 발달했다. 이렇게 환영을 창조하는 전통이 중시되면서 서양미술에서는 인간이 그 주된 표현 대상이 됐다. 무엇보다 인간은 인간이 재현하고픈 가장 매력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재현이 종국적으로 욕망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욕망의 주체인 인간을 표현하지 않고 욕망을 재현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면 동양에서는 자연이 그 주된 표현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동양의 미술이 세계의 사실적인 재현에 그다지 관심을 두어오지 않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교문화나 불과문화는 기본적으로 현상에 매몰되는 것을 꺼린다. 현상이면의 본질을 더 중시한다. 동양에서 현상을 뜻하는 가장 대표적인 글자가운데 하나가 색(色)이다. 예부터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했고, 오늘날에도 색은 색깔론, ‘색을 밝힌다’ , 도색잡지 등 부정적인 표현에 주로 쓰인다. 이런 부정적인 표현은 이 글자가 인간의 욕망을 진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여기기에 생겨난 것이다. 즉, 색은 욕망의 시각적 현현이고 욕망은 동양미술에서는 억제돼야 할 표현대상이었다. 사실 산수를 그린다 해도 동양의 산수는 순수한 현실 속의 자연이라기보다 정신세계, 혹은 우주를 관통하는 철리(哲理)의 시각적 상징에 더 가깝다. 따라서 현상의 재현을 통해 욕망이 분출되는 것을 피하고 세계의 본질을 보다 명료히 드러내기 위해 사실상 추상적 성격이 강한 산수화를 선호하게 됐던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이만수의 그림은 그 좌표가 다소 애매해 보일 수 있다. 그는 어쨌든 인간을 중요한 소재로 다룬다. 그리고 색을 적극 활용한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은 동양화, 혹은 한국화로 분류된다. 그의 그림이 과연 서구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동양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인가? 사실 이런 질문은 이만수에게만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요즘 많은 한국화들에게 동일하게 던져지는 것이다. 한국화가 이런 의문부호 위에서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게 되는 것은 그런만큼 불가피한 시대적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같은 질문도 따지고 보면 상당히 표피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편의에 따라 한국화니 서양화니 하며 지역에 따라 장르를 가른다. 인간의 예술인식이 동일하다면 그대상이나 방법상의 차이를 들어 굳이 편을 가르는 것은 상당히 소아적인 시각이다.

물론 문화의 충돌과정에서 발생한 형식상의 혼란을 정리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겠으나 그것은 시간의 도움을 얻어야할 유장한 일이다. 당장 중요한 것은 어떤 문화에 속한 것이든 주어진 전통과 새로 다가오는 전통에서 그 진정한 인간정신 혹은 인간의지 등을 찾고 이으며 이를 하나의 예술작품을 현재화하려는 노력이라 할 것이다.

이만수는 자신이 우리 전통으로부터 체현해야 할 중요한 가치, 또 문화의 경계를 넘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로 ‘성(誠)’을 생각했고, 이를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아왔다. 성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보아도 정성스러움, 혹은 성실함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서둘러 자기를 규명하고 확립하기보다, 나아가 스스로 완성된 존재라고 쉽게 나서기보다, 그저 성실히 맡은 일, 혹은 주어진 바를 온전히 이루려 부단히 땀을 쏟는 것, 거기서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 이만수의 붓길이다.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며 선을 긋기 이전에, 현대의 예술은 어떠해야 한다느니 하며 정의를 내리기 이전에, 화포에 먼저 붓부터 들이대는 것, 곧 예술이 그 스스로 이런 속성을 이해한다면, 오늘의 세계가 어떻게 헝클어져 있든 예술가라는 자는 일단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평상심 위에서 붓길을 이어가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온전한 완성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앞서도 말했듯 이만수의 그림에는 사람이 곧잘 등장한다. 때로는 얼굴이 큼지막하게 클로즈업돼 표현돼 있고 때로는 전신이 다 잡혀 있다. 사람의 신체 선묘가 패턴처럼 배경에 좍 깔려 있는 경우도 있다. 전통적인 서양미술의 시각에서 보자면, 인간은 지금 그림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주인공이자 주체이다. 전통적인 동양미술의 시각에서 보자면, 인간은 그림 속을 관류하는 철리의 한 관찰자이다. 관찰자로서의 인간은 산수화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인간이 그림 안에서 작은 관찰자로 존재함으로써 그려진 산수가 바라봄의 대상이라는 것과, 그 산수의 실제적 크기가 인간의 크기와 관련해 어떤 비례를 갖는지 명료히 가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양미술의 인간이 개척하고 투쟁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동양미술의 인간은 음미하고 깨닫는 존재이다. 사실 어느 존재를 더 우월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것은 동일한 인간의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서양미술에서 인간을 형상화하는 전통이 굳게 선 것은, 개척하고 투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의 중심에 서 있다. 동양 미술에서 인간을 형상화하는 전통이 비교적 약했던 것은, 음미하고 관찰하는 자로서 인간이 세계에 대해 늘 일정한 거리를 두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 뒤에서, 혹은 옆에서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만수의 사람이 이들 가운데 그 어느 일방이 아닌, 양자의 특징을 다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그의 인간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문화충돌의 현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그의 인간은 익명의 존재다. 보편적 인간이다. 특정한 모델을 두고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 사람의 생김새로부터 현실의 특정한 인간을 확인해내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米點(미점)처럼 저 멀리 사라져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얼굴만 부각되거나 몸이 화면 중심부에 턱하니 자리잡은 것이 화면상의 주체가 분명하다. 이렇게 익명성과 주체성이 동시에 만날 때 우리는 그 인물상에서 자연스레 작가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지금 그림밖에 있으나 그림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인간, 그는 작가다. 가장 보편적인 익명의 인간이 화면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주체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작가라는 정체성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자로서의 예술가는 창조의 순간, 그 스스로 모든 인간이면서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자화상이다. 화가의 자화상이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 인간상은 자연히 화폭 전체를 자신의 울림으로 감싼다. 그 주체가 창조자로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계의 중심으로서 세계에 개입하고 장악해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이만수는 음미하고 사유하는 인간의 모습 또한 진지하게 투영하고 있다. 일단 그의 인간이 상당히 정적인 포즈를 하고 있는 점을 유의해 보자. 얼굴도 대체로 정측면의 얼굴이 많고, 신체가 그려진 경우 그 신체의 표정도 상당히 정적이다.

그의 인간은 지금 사고하고 있다. 혹은 세상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그가 사유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그가 놓여 있는 공간이 사실상 자연스런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관념의 공간이라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그 공간은 그림 속 인간이 전개하는 사고의 편린들로 이어진 그런 공간이다. 그러니까 세계를 장악한 그는 어느덧 자신의 생각 속에, 자신의 꿈속에, 자신의 추억 속에 잠긴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화면상에 나타나는 색색의 점들, 선들, 그리고 기타 이미지들은 그의 생각 속에서 떠도는 기억들의 상징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물물을 마시고 시원한 밤하늘을 쳐다보면 추억일 수도 있고, 매화가 핀 봄에 그 꽃에 취해 흥겨워하던 추억일 수도 있다.

그런 기억이 그의 주위를 감쌀 때 그는 옛 선비들이 자연의 서정을 못 이겨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던 전통에 자연스럽게 합일해 간다. 그런 서정이 짙어질수록 그의 그림 속 인간은 그려진 형태에 비해 훨씬 작게 느껴지고 추억의 싯귀들은 그만큼 큰 울림으로 퍼져나간다. 여기서 인간은 다시 자연의 작은 관찰자일 뿐이다. 그 울림이 전통 산수의 그것처럼 유장하게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생생히 포착한 것이 매화꽃 문양이 규칙적으로 점점이 박힌 화폭이다.

인간 형상이 들어간 화면과 분리돼 추상화된 그 화폭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동양 회화의 깊은 정신세계를 다시금 맛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비켜서 있고 오로지 자연이 중심에 선 그런 느낌이다. 이만수가 기왕에 즐겨 써오던 ‘성’이라는 주제어 외에 ‘산조(散調)’ 라는 주제어를 택해 ‘성-산조’로 이번 전시의 타이틀을 삼은 것도 바로 그런 울림의 증폭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의 중심인, 주체로서의 인간으로부터 시작해 개인의 관념과 서정, 나아가 자연과 우주의 울림에 이르기까지 그 증폭되는 장단을 그는 가야금산조의 운율에 맞춰 전개시킨 것이다.

이렇듯 이만수는 오늘의 우리가 당면한 복합적인 상황과 그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반응을 나름의 방식으로 풀고 엮고 조형화하고 있다. 거기에 고정된 장르나 양식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의도와 지향을 놓치는 꼴이 된다. 그는 풀어둔 채 그대로 두지도 않고 또 엮어놓은 채 그대로 두지도 않는다. 꾸준히 풀고 엮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의 예술적 지향이 ‘성(成)’ 이 아니라 ‘성(誠)’ 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더욱 가치 있는 덕목이 아닌가 싶다.